김훈 장편소설
흑산
김훈 (지은이) | 학고재 | 201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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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피 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며
15년 전 일산으로 이사온 뒤에 자유로를 타고 한강을 따라서 서울에 드나들었다. 귀가하는 저녁이면 하구 쪽으로 노을이 넓고 깊었다. 옛 양화진(楊花津) 자리에 강물을 향해 불쑥 튀어나온 봉우리가 있는데, 누에 대가리 같다고 해서 이름이 잠두봉(蠶頭峰)이었다.
140여년 전에 무너져가는 나라의 정치권력은 이 봉우리에서 '사학(邪學)의 무리'를 목 자르고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죽임을 당한 자들이 1만명이 넘었다. 서쪽에서 낯선 시간이 거슬러 올라오던 한강은 피로 씻기었고 봉우리의 이름은 절두산(切頭山)으로 바뀌었다. 땅 위의 길을 다 걸어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일이 그토록 어려워 산천은 피에 젖었다. 140년 전이면, 아주 가까운 과거일 것이다.
절두산은 자유로에 바짝 닿아있다. 잠두봉은 조선시대에 한강의 절경으로 꼽혔고 겸재(謙齋)는 이 자리를 <양화환도(楊花喚渡)>라는 화폭에 그렸는데, 지금 절두산은 매연에 찌든 흙더미이다.
비오는 날에는 절두산 벼랑이 빗물에 번들거리고 그 아래 자유로에는 늘 자동차들이 밀려있었다. 자유로를 따라서 서울을 드나들 때마다, 이 한줌의 흙더미는 나의 일상을 심하게 압박하였다. 이 소설은 그 억압과 부자유의 소산이다.
절두산 아래를 통과해서 귀가하는 날들이 오래 계속되었다. 나는 흑산도나 남양성모성지, 배론성지 같은 사학죄인들의 유배지나 피 흘린 자리를 답사했고 기록들을 찾아서 읽었다. 나는 흑산에 유배되어서 물고기를 들여다보다가 죽은 유자(儒者)의 삶과 꿈, 희망과 좌절을 생각했다. 그 바다의 넓이와 거리가 내 생각을 가로막았고 나는 그 격절의 벽에 내 말들을 쏘아댔다. 새로운 삶을 증언하면서 죽임을 당한 자들이나 돌아서서 현세의 땅으로 돌아온 자들이나, 누구나 삶을 단념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흑산의 여러 섬에 갔더니, 물고기를 들여다보던 유배객의 자취는 풀섶에 덮혔고 지나간 날들의 물고기는 오늘의 물고기로 이어져서 연안으로 몰려왔다. 섬에서 죽은 유자의 넋이 물고기가 되어 온 바다에 들끓는 것이려니 여겼다.
여러 연구자들의 학문적 업적에 힘입어서 사학죄인으로 죽은 많은 사람들의 생애와 심문기록을 읽을 수 있었다. 그 기록의 한 줄 한 줄은 내가 소설이나 작문으로써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기록과 사실들을 소설로 끌어들이지 못한 채, 그대로 놓아두고 다만 읽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한다. 나는, 겨우, 조금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이나 글로써 설명할 수 없는 그 멀고도 확실한 세계를 향해 피 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또 괴로워한다. 나는 여기에서 산다.
늘, 너무나 많은 말을 이미 해버린 것이 아닌지를 돌이켜 보면 수치감 때문에 등에서 식은 땀이 난다. 이 책을 쓰면서도 그러하였다.
혼자서 견디는 날들과, 내 영세한 필경의 기진한 노동에 관하여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다.
<목차>
선비
사행
마노리
사공
손 싸개
박차돌
섬
육손이
하얀 바다
방울 세 개
게 다리
감옥
제 갈 길
백도라지
새우젓 가게
마부
흙떡
날치
고등어
여기서
참언
수유리
오빠
황사경
주교
항로
염탐
집짓기
토굴
네 여자
풀벌레 소리
자산
은화
잠적
비단 글
뱉은 말
형장
닭 울음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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