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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群鷄一鶴[군계일학] |
겉뜻=닭의 무리 속에 끼어 있는 한 마리의 학이란 뜻(鷄 : 닭 계, 群 : 무리 군, 一 : 한 일, 鶴 : 학 학) |
유래
위진시대에는 혼란스러운 세상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가 문학과 노장의 사상, 음악 등 청담(淸談)을 담론하며
세월을 보내던 선비가 적지 않았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죽림칠현(竹林七賢)으로 불리는 일곱 명의 선비 완적, 완함, 혜강, 산도, 왕융, 유령,상수 등이다.
이들 가운데 혜강은 특히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는데,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을 당하였다.
당시 그에게 열살박이 아들 혜가 있었다.
혜소는 장성하자 혜강의 친구 중 한 사람인 산도가 혜소를 무제(武帝:265~290)에게 천거하며 이렇게 말했다.
"《서경(書經)》 〈강고편(康誥扁)〉에 보면, 아버지와 자식간의 죄는 서로 연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혜소는 비록 혜강의 아들이지만 춘추시대 진나라의 대부 극결에 뒤지지 않을 만큼 총명합니다.
그를 비서랑으로 임명하십시오."
무제는 "경(卿)이 천거(薦擧)하는 사람이라면 승(丞)이라도 능히 감당할 것이오"라고 흔쾌히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혜소는 비서랑보다 한 계급 위인 비서승에 임명되었다.
혜소가 낙양으로 가던 날,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가 다음 날 왕융에게
"어제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궁궐로 들어가는 혜소를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의젓하고 늠름하여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있는 한 마리의 학 같았습니다.
그러자 왕융은 말했다. "혜소의 아버지는 그보다 더 뛰어났었다네. 자네는 그의 부친을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일세."
왕융의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혜소는 부친만은 못하지만,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다.
여기서 '계군일학'이란 말이 나왔으며
이 뜻은 학립계군(鶴立鷄群)군계일학(群鷄一鶴)·계군고학(鷄群孤鶴) 등과 같이 통용된다.
혜소는 나중에 시중으로 승진하여 혜제 곁에서 직언을 올리는 몸이 되어 올바르고 곧게 처신하였다고 한다.
팔왕의 난이 한창일 때 혜제는 이를 진압하려고 군병을 일으켰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피란을 가게 되었다.
해소가 부름을 받아 당도하였을 때는 혜제의 군이 이미 패하였을 때였다.
해소는 백관 시위가 모두 도망해 버린 곳에서 홀로 의관을 바로하고, 창과 칼이 불꽃을 일으키는 어차 앞에서 몸으로 혜제를 감싸며 지키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혜제의 어의를 선혈로 물들였다.
난이 끝난 뒤, 근시들이 의복을 빨려 하자 혜제는 “이것은 해소가 흘린 충의의 피이다. 씻어 없애지 마라" 하였다 한다.
출전
《진서(晉書)》 〈혜소전(乂紹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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